'엉금엉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대단한 크기의 쥐였다. 그 녀석은 거기서 오래 기생했던 듯했다. 주방 식구 중 누구 하나 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도 녀석은 눈치 보는 기색 없이 부엌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 내려쳤다. 맞은 놈이 싱크대 밑으로 도망갔다. 그걸 다시 잡아 꺼내 주먹으로 후려쳤다. 내친김에 부엌을 뒤져 나머지 두 놈을 더 잡았다.
1990년 도쿄의 대표적 레스토랑 '퀸 앨리스'에서의 일이다. 한국에서 온 요리사는 아무도 시키지도, 하지도 않는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몇 달 후, 일본 요리계에서 알아주는 이 집 사장, 이시나베 유타카가 그에게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가 "어렵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프랑스에 가서 요리를 좀 더 배워보라"고 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날 때 이 식당 사장은 추천서와 비행기표, 그리고 용돈 20만엔을 챙겨 줬다.
요리사 김원일(53)은 이런 사람이다. 요리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맨손으로 쥐를 잡을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그래야겠다면 물불을 안 가리고 몸을 던지는 성격이다. 얘길 하다 저절로 흥분하고, 언성이 높아진다. 일본 최고인 아베노쯔지 조리사전문학교, 대학원을 3년이나 다니고 일본에서, 프랑스에서 일식과 프렌치 요리를 제대로 배웠다지만, 그는 여전히 흥분 잘하고 목소리 큰 '부산 사나이'다.
이 부산 남자가 이번에 또 사고를 쳤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책 10권을 낸다. 책을 엮기 위해 찍어 놓은 사진 도판을 봤다. 그간 적지 않은 숫자의 국내외 요리책을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도판은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릇이며 재료, 담음새와 조명이 수준급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걸 만드는 데 쓴 돈을 계산해보니 10억원이 훌쩍 넘어간다. 원고는 모두 대학노트에 손으로 썼고 거기에 그림도 그려놨다. 책을 낸 출판사명은 '도서출판 元一'이다. 8개 출판사와 접촉했지만, 그걸 컴퓨터에 옮기고 그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줄 출판사는 없었다. 원고에 한문이 너무 많아 인력과 돈도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화가 나서 출판사를 등록하고, 외주업체에 일을 맡겼다. 그 첫 세 권은 25일 나온다.
책 얘기를 들려주던 그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이 식당도 부동산소개소에 내놨어요. 지금 마음 같아서는 식당 팔아치우고 이민 가고 싶은 생각이라요." 화가 나면 뭐가 됐든, '내일 당장 때려치운다'고 말하는 게 한국 남자들. 그가 진짜 식당을 때려치울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다 그놈의 '불 같은 성격' 때문이다.
실패한 실험, 도제식 요리학원
정통 일식을 좋아하는 이라면, 김원일의 회와 초밥에 빠져들기 쉽다. 미식가로 소문났으며 그의 식당에 15년째 다니고 있는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시미(視味·보는 맛), 후미(嗅味·향기의 맛), 기미(器味·그릇의 아름다움)를 낼 줄 아는 요리사이며 맛을 멋으로 승화시킨 장인", "손님이 초고추장을 달라고 하면 상대를 안 하는 고집쟁이지만 맛의 정수를 파악하고 있는 일종의 예술가"라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그의 요리에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요리 가격이 서울 강남보다도 비싼 축에 들고, 분당에 있는 그의 식당 '쯔루가메(鶴龜)스시'에서는 이른바 '쓰키다시'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일본식으로 튀김에 간장 대신 소금이 나와 모르는 이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한다. "잘난 척해서 재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1997년, 빚을 내 테이블 세 개짜리 식당으로 시작한 그의 가게는 이제 분당 율동공원 근처의 어엿한 빌딩으로 성장했다. 그의 스시 맛을 평가해주는 사람이 그만큼 많이 생겼다는 얘기다.
요리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걸까. 그가 도제식(장인 밑에서 혹독하게 일을 배우는 방식) 요리학원을 연 것은 94년 말이었다. 연간 학원비가 2500만원이 넘는 학원을 열어 4기까지 약 80명의 수강생을 받았지만, 과정을 끝까지 마친 수강생은 단 10명이었다. 이 정도면, 뭔가 단단히 문제가 있는 거다.
―왜 이렇게 끝까지 남은 학생이 적은가.
"도제식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서둘러 기술을 배워 빨리 나가고 싶어했다. 요리 말고 붓글씨, 어탁, 꽃꽂이까지 전인적 교육을 하는 걸 내켜 하지 않았다. 퇴학당한 수강생들이 나에게 집단소송을 걸기도 했고, 어떤 수강생은 학대와 수모를 당했다며 변호사를 통해 내용증명을 보냈다. 혹독한 훈련을 다 감수하겠다는 서약서까지 다 써놨던 사람이다. 모든 걸 쏟아부은 제자 중 하나였다. 원래 도제교육이라는 게 혹독하다. 게다가 요리사는 칼을 잡는데 엄하게 가르치는 게 기본이다."
―엄격한 수업 과정 때문에 나갔다고만 보기는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 아닌가.
"물론 1기 학생들 수업에서는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1층 식당과 2층 학원을 겸하다 보니 수업이 늦게 시작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송을 걸 만큼 잘못됐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칼 하나의 부분 명칭이 26가지이고, 야채 다듬는 방법이 160가지다. 그런 걸 다 가르치고 싶었는데…."
―1기야 그렇다 치고, 나머지 학생들과도 분쟁이 있었다면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 커리큘럼은 내가 요리를 배웠고 지금 내 아들도 유학을 가 있는 일본 쯔지(조리사전문학교)에 비해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 오히려 거기보다 나으면 나았지. 일 년에 두 차례 일본 최고 레스토랑과 호텔에 연수도 보내줬다. 수강생들이 '왜 일본 식당에 가서 심부름해야 하느냐'며 출발 이틀 전 안 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 분위기를 익히는 것만도 엄청난 공부인데. 어떤 수강생은 일본 연수 가서 '학원 그만둘 테니 취업시켜달라'고 했다더라. 나는 그들이 배우고 연수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다 촬영해 기록해뒀다. 수업이 부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 이어 일본 요리 명문인 쯔지학교에 재학 중이다. 아들은 그런 도제식 교육을 안 시키는 것 아닌가.
“내 아들 역시 오사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일식집서 하루 5시간씩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거기서도 실수를 하면 칼등으로 머리를 때리고, 프라이팬으로 머리 치는 건 예사다. 그런 집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라고 아들에게 얘기한다. 아들도 처음엔 ‘아버지 방식은 너무 강하다. 바꾸라’고 했지만, 일본에 가더니 ‘더 강해도 된다. 아버지 교육은 일본에서 알아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때 겪은 수모로 온 가족이 모여 엉엉 울었고, 그 때문에 죽을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잠을 잘 수 없어 붓글씨를 썼다는데, 그 덕에 베세토(베이징·서울·도쿄)국제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됐다. 불면의 밤이 낳은 쓰디쓴 열매였다.
여기까지는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학원을 다니다 뛰쳐나온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 학원에서 수강한 A씨의 말. “그 선생님의 의욕만큼은 인정한다. 나도 유사업종에 종사한 터라 그 식당에 여러 번 가서 음식을 먹어보고 그 능력을 인정했다. 그래서 일 년에 2500만원이 넘는 돈을 내고 등록했다. 도제식 교육이 힘들어서 그걸 그만둔 게 아니다. 문제는 도제식 교육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3월 개강이 당초 목표보다 며칠 늦어진 것으로 시작해, 식당과 겸업을 하느라 수업 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수강료 중 한 달 요리 재료값이 130만원이었는데, 3개월간 390만원의 재료비 중 130만원 정도만 지출된 식이었다. 강사진도 부실했고, 커리큘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코 도제식 교육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학원을 열었다가 학생들이 많이 나갔다는 상황은 뻔하게 하나인데, 쌍방의 진술은 확연히 엇갈린다. 일본 영화 ‘라쇼몽’ 같은 설정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요리만화에나 나오듯, 무 하나를 갖고 백 가지의 맛을 내는 후배를 길러내고 싶었다. 그의 설득의 기술이나 시스템은 그 의욕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호응하기엔 다들 갖고 있는 야망이나 꿈이 달랐다.
얄궂은 요리책은 가라
요즘 많이 팔린다는 요리책 하나를 펼쳐 보이며 그가 말을 쏟아냈다. 레시피도 엉터리고, 그림도 너무 엉망이라는 요지였다. “소금과 설탕이 있으면 설탕을 먼저 넣어야 한다. 소금을 먼저 넣으면 분자가 커 양념이 배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을 봐라. 너무 조잡하지 않나. 싼값에도 멋지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왜 엉망으로 먹는 게 버릇이 되도록 요리책을 쓰나.”
그렇다면 그의 책은 얼마나 다를까. 지난달 나온 ‘김원일의 정통회요리 318선’(교육출판공사)에 이어 25일 ‘김원일 디저트 250선’ ‘김원일 전채요리 318선’ ‘김원일의 맛있는 밥요리 235선’ 세 권이 발매된다. ‘칼의 테크닉(상·하)’, ‘일본요리 기술 교본(상·하)’ ‘김원일의 고등어요리 250선’ ‘김원일의 외골요리인생’이 나오면 10권이 채워진다. 나오지 않은 책 역시 사진촬영까지 다 끝났고, 편집이 남아 있다. 이미 13권의 책을 썼지만, 새 책 10권은 그의 요리기술의 집대성이다. ‘전채요리 318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계란 반숙을 반으로 자를 때 칼로 자르면 노른자가 흘러나와 못 쓰게 되므로 반드시 실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단숨에 자르는 것이 요령이다.’ 이토록 자세하다.
―책 내용도 대단하고, 무엇보다 책에 쓰인 사진이며 식재료가 엄청난데 비용이 많이 들었겠다.
“지금까지 벌어놓은 거 다 털어 넣었다. 촬영에 사용된 그릇이 1100종류, 1년 4개월간 사진작가가 민통선부터 제주도까지 6번을 훑었다. 감자 싹 날 때, 싹 자랐을 때, 감자꽃 필 때, 수확할 때 이런 식으로 촬영해서 썼다. 촬영사진이 50만 커트다. 한국에서 나지 않는 재료는 아내와 일본에서 유학 중인 아들 둘이 나에게 보내줬다. 그릇 값 2억5000만원, 사진 촬영·출장비 3억8000만원, 연어알·송이·비파·은어·갯장어·자라 등 재료비 2억원 등에 인쇄비용 등을 합치면 10억원은 훨씬 넘는다.”
―그렇게 돈 들여 자비 출간을 하는 게 믿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게 베스트셀러감도 아니지 않은가.
“안 팔려도 상관없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나. 생선의 유래, 생태학, 해부학까지 다 가르쳐 놓아도 돌아오는 게 배신이니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더라. 그때까지 대학노트 70권에 내 노하우를 정리해놨는데, 그거 다 불태우고 떠나려 했다. 그냥 떠나려니 속이 쓰리더라. 내가 이렇게 먹고살고, 돈 벌러 건물 올린 것도 다 국민 덕인데, 내 기술을 책으로 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신뢰가 잘 안 간다.
“나는 그 사람들보다 한 자(字)라도 더 배웠고, 더 많이 경험해봤다. 내 거 보고 이제 좀 제대로 해봐라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일종의 명예욕인가.
“그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기업 찾기가 정말 힘들다. 일본에는 100년 넘은 기업만 2만 개가 넘는다. 그 사람들이 정신병자라서 그런가. 좋은 건 물려주고 앞으로 남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져야 한다. 그래서 책에도 기본부터 썼다.”
―기본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탈리아 주방에서 일하면서 스파게티 삶는 물에 소금을 왜 넣는지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가락시장에 가 봐라. ‘싱싱하다’며 생선을 뜰채로 떠서는 바닥에 확 던진다. 고기는 충격을 주면 근육이 수축되면서 본능적으로 정자를 배출한다. 그러면 맛이 없다. 생선은 처녀 가슴처럼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 그런 걸 알아야 지지고 볶는 거 아닌가. 볶는 것도 열만 가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7단계가 있다. 칼 들고 서 있는 폼만 보면 그 사람 수준이 다 나온다.”
―요즘 책 만드는 일은 정말 쉬워졌다. 이미 찍어놓은 사진도 장당 얼마에 구입하면 되고. 왜 일일이 원재료부터 사진을 찍었나.
“요즘 일식 요리사들도 고추냉이(와사비)를 쓸 줄만 알지, 그게 어느 정도 수온에서 어떻게 재배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원재료의 성장부터 수확, 쓰임새까지 다 보여주려면 직접 찍는 수밖에 없었다. 식물은 물론 자라 같은 재료도 구매해서 잡는 과정까지 다 촬영했다.”
―재료 구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겠다.
“산초나무 잎, 초귤, 자소꽃 열매를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아내가 일본서 구해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런데 식물을 가져오는 바람에 공항 세관에서 걸렸다. ‘촬영할 수만 있게 해달라’고 빌어 다음날 사진작가가 세관에 가서 압수당한 물품 사진을 찍었다. 고추냉이를 찍으려 민통선 안에 들어갔는데,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라 애먹었다. 겨우 찍긴 찍었지만.”
―디저트도 따로 요리 책으로 내는 건 왜인가.
“고급식당에 가도 디저트로 나오는 건 배나 사과 한 조각이다. 술 취한 손님들은 뭘 줘도 그냥 입가심으로 생각하니까 고급스러운 것을 줄 필요도 없던 거다. 요리책에 250가지의 레시피를 공개했다. 디저트는 명백한 요리다.”
―뭐 하러 그렇게 고생하면서 책을 만드는지,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
“된장찌개 5000원 받으면 사실 망한다. 재료 사고, 불 쓰고, 밥 주고, 반찬 주고 그렇게 해서 500원 남으면 뭐 하나. 우리 식당도 이제 고부가가치 음식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이제 바뀔 때도 됐다.”
김원일의 식당, 정통 혹은 오만
쯔루가메스시의 음식은 양이 적고 비싼 편이다. 그래서 음식 좀 먹는다는 사람들이 한 번쯤 들러보는 곳이지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경우는 별로 없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엔 제대로 된 일식집이 없다’고 하면서도 결국 쓰키다시(つきだし·곁들임 요리로 일본에서는 ‘오토시’란 말을 많이 쓴다) 많이 나오는 집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더라. 영업은 잘 되나.
“쓰키다시는 뇌에 ‘이제 요리를 먹으니 준비하라’는 신호로 내는 요리다. 일본의 고급식당에서도 한두 가지만 낸다. 그런데 우리는 손님 끌려고 막 주기에 바쁘다. 그러니 막상 메인이 나오면 배불러서 못 먹는다. 이게 고급요리 내는 법인가.”
―손님들이 여기는 곁들임 요리 적게 나온다고 투덜거리지 않나.
“강남 가서 배워오라는 손님이 아직도 있다. 장사꾼에게 상도(商道)가 있으면 손님에겐 객도(客道)가 있어야 한다. 손님이 요리를 두고 불만이나 충고를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식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풋고추랑 된장 달라는 말을 안 하나. 일식집에서만 그런 걸 찾는다. 물론 한국식 일식도 인정한다. 하지만 순수 일식을 추구하는 식당에 와서 그런 것 찾는 것은 요리를 죽이는 거다. 그러려면 오지 말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 ‘직원이 서툴다’는 말도 있더라.
“여자 종업원을 뒀더니, 팁 주는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더라. 그래서 남자 연수생으로 다 바꿨다. 문제는 두세 달 만에 기술 배워 나가겠다는 경우가 많고, 훈련 잘 받은 내 직원을 빼가려는 동종업계 사람이 많다는 거다.”
―식당에서 내는 초밥에 얹은 생선이 작은 편이더라.
“프로들은 대개 생선 15g, 밥 20g을 합쳐 35g으로 만든 초밥을 적정하다고 친다. 초밥은 입에 들어갔을 때 밥이 타액을 흡수하면서 맛이 결정 나는데, 이 비율이 좋다는 거다. 그런데 요즘 강남에서 나오는 초밥의 회는 왜 그렇게 긴가. 끊어진 빤쓰 끈도 아니고. 초밥용 회는 중지에서 소지까지 약 8㎝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회가 큰 게 좋으면, 사시미 실컷 먹고 밥 한 숟갈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건 고급 아니다.”
―일본이 싫다며 정통 일식에는 왜 그리 집착하는가(그는 식민지배에 대한 적절한 사과가 없는 일본, 독도 문제에 미온적인 한국 정부를 열렬히 성토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다녀와 81년 부산 코모도 호텔 일식당에서 근무할 때다. 선배들은 나가고 나 같은 보조들만 있는데 주문이 들어왔다. 내가 낸 음식을 먹고 일본 사람이 난리를 치더라. 음식이 엉터리라고. 그 사람이 일본에 돌아가 나에게 책을 보내줬다. 그 책을 보니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더라. 그 이후 일본-사우디 간 LNG운반선 주방에 근무하면서 돈 벌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오사카 쯔지학교에 가보니 그동안 해왔던 것은 돼지죽에 불과하더라.”
그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요리 배우고 싶은데 정말로 너무 가난한 사람은 무료로 키워주고 싶다”는 걸 꼭 기사에 써달라고 했다. “단, 들어올 때 정확하게 ‘인내’하겠다는 서약을 받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공들였던 수강생으로부터 황당한 꼴 당하고, 요리 양 적다고 불평하는 손님을 보면서 솔직히 요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차라리 여길 떠나 뉴욕에 가서 진검승부를 해볼까”, “얄궂게 말고 제대로 된 체인사업을 해서 돈 벌고, 그걸로 정식으로 요리학교를 세워 볼까 하는 미련도 있다”…. 그는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젠 잊었다면서도 아직 화(火)를 다스리지 못한 눈치였다. 이렇게 큰돈 들여 책을 내는 것도 오기(傲氣)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리는 물·불·소금을 다루는 일”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무를 얇게 저며낼 때, 그가 가장 멋스럽게 보인다는 걸, 그도 빨리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은주 기자 zeeny@chosun.com
(Source: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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